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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안중근 하얼빈 의거
영화로 다시 본 안중근 그리고 그가 남긴 무게
포로 석방과 단지동맹 — 원칙이 부른 비극 그리고 다짐
안중근이 처음부터 비운의 의병장이었던 건 아니에요. 1908년 여름 두만강을 건너 국내로 진공한 그는 홍의동과 신아산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잇따라 기습에 성공하며 기세를 올렸어요. 이 흐름이라면 다음 전투도 해볼 만하다는 자신감이 있었겠죠. 그런데 회령의 영산 전투에서 결과는 처참했어요. 압도적인 병력의 일본군에 부딪혀 부대가 거의 다 스러지고 안중근은 천신만고 끝에 겨우 몸만 빠져나왔어요. 이끌던 의병부대가 사실상 해체되어버린 거예요. 저는 이 대목을 처음 읽었을 때 좀 기분이 이상하더라구요.
패인이 놀라운 데 있었어요. 앞선 전투에서 사로잡은 일본군 포로들을 안중근이 직접 풀어줬는데 그 포로들이 부대 위치를 일본군에 알렸다고 전해져요. 안중근이 포로를 살려 보낸 건 만국공법과 천주교 박애 정신에 따른 결정이었어요. 여기서 만국공법이란 전쟁 중에도 포로를 인도적으로 대해야 한다는 그 시절의 국제 규범을 말해요. 원칙만 놓고 보면 분명 옳은 선택이에요. 그런데 솔직히 저는 그 결정이 너무 아쉽고 아팠어요...
영화에서 이 장면을 볼 때는 안타깝다 못해 살짝 화까지 났어요. 저는 이미 이 이야기의 결말을 알고 있잖아요ㅠㅠ 그래서 포로를 순순히 풀어주는 안중근을 보면서 속으로 아 진짜 왜 그러는 거야 안 돼 하고 발을 동동 굴렀어요. 저 포로들 때문에 부대원들이 죽어가는데 만약 제가 그 부대의 아랫사람이었다면 안중근을 원망했을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었어요. 일제의 만행을 역사로 배운 저로서는 아무리 포로라 해도 좀 더 냉정하게 처리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어요. 그렇지만 바로 그 지점이 안중근과 저의 차이라고 느끼긴 해요. 그는 분명 저보다 훨씬 큰 그릇을 가진 사람이었어요.
문제는 그 결과였어요. 자기 결정으로 동료 수백 명을 잃은 셈이니 보통 사람이라면 죄책감에 무너졌을 거예요. 그런데 안중근은 포기하지 않았어요. 연해주 일대를 돌며 동포들을 설득했고 다시 동지들을 모았어요. 앞서 그런 뼈아픈 선택을 했는데도 열한 명이나 그를 믿고 다시 함께하겠다고 나선 걸 보면서 안중근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어요.
그리고 1909년 3월 이들과 함께 단지동맹을 맺어요. 단지동맹이란 항일 의지를 피로 다지기 위해 스스로 왼손 손가락 한 마디를 끊어 맹세를 나눈 의식이에요. 단순한 퍼포먼스가 아니라 다시는 물러서지 않겠다는 선언이었죠. 동지들의 피를 모아 태극기에 대한독립이라는 네 글자를 남겼다는 기록을 읽으면서 영산 전투의 패배가 안중근을 꺾은 게 아니라 오히려 그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어요.
그것은 다시는 물러서지 않겠다는 선언이었어요

하얼빈 의거 — 저격 한 발에 담긴 치밀한 계산
솔직히 고백하면 저도 하얼빈 의거를 오랫동안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쐈다는 단 한 줄로만 기억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실제 경위를 따라가 보니 이건 단순한 저격이 아니라 국제정치적 효과까지 계산된 작전이었어요.
1909년 10월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을 방문한다는 소식이 신문에 실렸어요. 이토는 대한제국의 초대 통감으로 사실상 조선 침략의 설계자였어요. 통감부란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일제가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고 내정을 틀어쥐려고 세운 통치 기구예요. 안중근은 이토를 일본 제국주의의 원흉으로 봤고 그를 처단해야만 대한제국과 동양의 평화가 가능하다고 판단했어요. 이 판단 자체가 이미 하나의 정치적 선언이었죠.
이토가 하얼빈에 온 목적은 러일전쟁 뒤 만주 지배권을 확정하려고 러시아 측과 벌이는 외교 협상이었어요. 안중근이 거사 장소로 하얼빈을 고른 데는 이유가 있었어요. 하얼빈은 당시 여러 열강의 이해관계가 교차하던 국제도시라 이곳에서 벌어진 일은 전 세계에 즉각 타전될 수밖에 없었거든요. 국제도시라는 무대가 가진 상징성을 활용한 거예요. 저는 이 부분을 보며 신문으로 일정을 확인하고 장소가 가진 국제적 의미까지 계산했다는 사실에 새삼 소름이 돋았어요.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경 이토를 태운 기차가 하얼빈역에 들어섰어요.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하며 플랫폼에 내린 이토가 열 걸음 남짓 거리로 다가온 순간 안중근은 방아쇠를 당겼어요. 오전 9시 30분경이었고 세 발이 이토에게 명중했어요. 이토는 곧바로 쓰러졌고 약 30분 뒤인 10시경 숨을 거뒀어요. 그리고 안중근은 거사 직후 도망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뒤 러시아 헌병에게 순순히 붙잡혔어요.
저는 이 마지막 장면이 오히려 가장 오래 마음에 남더라구요. 도망치지 않고 만세를 외쳤다는 건 자신이 왜 이 일을 했는지 온 세상에 알리는 것까지가 계획의 일부였던 게 아닐까요. 거사가 성공하든 못 하든 자신의 죽음을 이미 각오했을 텐데 방아쇠를 당기기 직전 그의 머릿속에는 대체 어떤 생각이 흘렀을까요. 솔직히 저는 같은 상황에서 그런 선택을 할 자신이 없어요.
일반적으로 하얼빈 의거는 단순한 암살 사건으로 분류되기도 해요. 그런데 저는 이렇게 경위를 직접 쫓아보고 나서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어요. 이건 충동이 아니라 죽음을 각오하고 치밀하게 준비한 독립 의지의 공개 선언이었어요. 안중근이 스스로 개인이 아니라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이토를 처단한 것이라고 밝힌 것도 같은 맥락이겠죠.
홍의동 신아산에서 일본군 기습에 잇따라 성공
회령 영산 전투에서 대패하고 의병부대가 해체됨
동지 열한 명과 단지동맹을 맺고 태극기에 대한독립 혈서
하얼빈역에서 이토를 저격하고 현장에서 체포됨
자주 묻는 질문
마치며
안중근 의사를 교과서 속 한 줄로만 알고 지냈는데 이번에 의병 활동부터 하얼빈 의거까지 그 흐름을 직접 따라가 보고 나서야 무게를 조금이나마 실감할 수 있었어요. 영산 전투의 참패도 단지동맹도 의거 직후 만세를 외치며 체포를 기다린 것도 하나하나가 그냥 지나치기엔 너무 많은 말을 담고 있어요.
처음엔 포로 석방을 두고 잘못된 선택이 아닌가 싶었던 저는 단지동맹 이야기를 읽고 난 뒤로는 그 판단을 함부로 비판할 수 없다고 느꼈어요. 원칙을 지킨 대가로 동료를 잃고도 다시 일어선 사람에게 저 같은 사람이 쉽게 잣대를 들이밀 수는 없겠더라고요. 익히 알던 이름도 이렇게 차분히 따라가 보면 전혀 다르게 다가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