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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도 무릎 꿇린 교회 권력
교황 · 수도원 · 지식

왕을 무릎 꿇린 교황의 권력
저는 학교 다닐 때 역사 시간을 참 좋아했는데요 그중에서도 중세시대에는 교황의 힘이 왕보다 강했다는 이야기가 유독 기억에 남더라고요. 그때는 그냥 시험에 나오니까 중세에는 교황권이 강했다 하고 외웠었어요. 근데 이런저런 역사 이야기를 찾아보다 보니 이게 새삼 이상하게 느껴지는 거예요. 한 나라에 왕이 있는데 그 왕보다 교황이 힘이 셌다니 지금 생각으로는 도무지 상상이 안 되잖아요ㅎㅎ 그런데 이걸 단번에 이해시켜주는 사건이 하나 있어요.
때는 1076년이에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가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랑 크게 부딪쳤어요. 원래 성직자를 임명하는 권한을 두고 다툰 건데 화가 난 교황이 황제를 파문해버려요. 파문이 뭐냐면 교회에서 내쫓는 거예요. 사실 지금 생각하면 종교에서 쫓겨나는 게 뭐 그리 큰일인가 싶은데 이 시대엔 차원이 다른 문제였어요. 파문을 당하면 신하들이 황제에게 했던 충성 맹세에서 전부 풀려나거든요. 쉽게 말해 왕이 왕 노릇을 할 근거 자체가 사라지는 거예요.
발등에 불이 떨어진 황제는 결국 교황을 찾아가기로 해요. 교황이 머물던 곳은 이탈리아 북부의 카노사라는 성이었어요. 한겨울에 알프스를 넘어야 하는 험한 길이었죠. 그렇게 도착한 황제한테 교황은 성문을 열어주지 않았어요. 그래서 황제는 눈 내리는 성문 앞에서 무려 사흘 동안 맨발로 서서 용서를 빌었다고 전해져요. 한 나라의 황제가 교황한테 빌었다니.. 이 부분이 저는 제일 신기했어요. 자기를 파문한 교황을 찾아가서 맨발로 비는 황제라니 대체 교황이 얼마나 대단한 권력을 쥐고 있었기에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요. 이 장면이 얼마나 강렬했으면 카노사의 굴욕이라는 이름까지 붙어서 지금까지 전해질 정도예요. 결국 사흘째 되던 1077년 1월 교황은 황제를 용서하고 성문을 열어줬어요.
그때 황제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요. 솔직히 진짜 뉘우쳐서 빌었다기보다 일단 파문부터 풀고 보자는 심산이었겠죠. 실제로 역사학자들도 이 사건을 황제의 정치적 계산으로 보는 시각이 있어요. 진심 어린 참회라기보다 위기를 넘기려는 전략이었다는 거죠. 실제로 나중에 둘은 다시 등을 돌리기도 했고요. 그러니까 카노사의 굴욕을 교회의 완벽한 승리로만 보는 건 조심스러워요.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해요. 황제조차 교황 앞에서 무릎 꿇는 모습을 온 세상에 보여줬다는 것 자체가 이 시대 교회 권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상징적으로 드러낸다는 거예요.
그리고 이 교황의 힘은 먼 훗날 다른 나라에서도 드러나요. 바로 헨리8세 이야기인데요~ 오늘도 어김없이 제 글에 헨리 8세가 등장하네요ㅎㅎ 중세랑 근세 역사를 이야기하다 보면 진짜 단골손님이에요. 예전에 헨리 8세가 첫 번째 왕비랑 이혼하고 싶어서 교황한테 허락을 구했다고 했던 거 기억나시나요. 교황이 끝내 허락해주지 않자 헨리 8세는 아예 영국만의 교회를 새로 만들어버렸죠. 근데 황제까지 파문해버리던 교황의 권력을 생각하면 헨리 8세가 아예 새 종교를 세운 게 얼마나 겁 없는 짓이었는지 새삼 실감이 나요ㅋㅋ 시대도 나라도 다르지만 왕의 개인사까지 교황의 승인이 필요했다는 점에서 이 두 이야기는 하나로 이어져요.

수도원이 실제로 하던 일들
수도원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세요? 저는 절벽이나 돌산 위에 덩그러니 자리 잡은 수도원이 떠올라요. 거기서 수도사들이 평생 기도하고 책 읽으며 지내는 모습이요. 영화나 그림에서 본 이미지가 그래서인지 세상과 뚝 떨어진 단절된 느낌이 딱 들거든요. 그런데 실제 중세 수도원은 그런 조용한 이미지랑은 거리가 멀었어요. 오히려 마을에서 제일 바쁘게 돌아가는 만능 기관에 가까웠거든요. 신기하죠?
수도원이 한 일을 하나씩 보면 놀라워요. 먼저 수도원은 그 시대 최고의 도서관이자 학교였어요. 지금처럼 책이 흔하지 않던 시절이라 귀한 지식이 대부분 수도원에 모여 있었거든요. 그리고 병원이자 약국 역할도 했어요. 아픈 사람을 돌보고 직접 약초를 길러 약을 만들었죠. 여관 노릇도 했어요. 먼 길을 떠나온 순례자들이 수도원에서 하룻밤 묵어갈 수 있었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문을 열어줬어요. 심지어 농업 연구소이기도 했어요. 새로운 농사 기술을 개발하고 퍼뜨렸고 치즈나 맥주 만드는 법도 수도원에서 발전했어요. 수도원 하나가 작은 마을의 중요한 시설을 거의 다 담당한 셈이라 제가 상상하던 단절된 이미지랑은 정반대네요.
특히 맥주 이야기가 재밌어요. 지금은 종교인 하면 왠지 맥주랑은 거리가 먼 이미지인데 수도원 맥주가 유명하다니 뭔가 이상하고 웃기잖아요ㅋㅋ 제가 상상하던 건 조용히 성경을 필사하는 모습인데 알고 보니 맥주로 유명한 수도원이라니 반전이에요. 사실 수도원에서 맥주를 만들기 시작한 건 놀랍게도 안전한 마실 거리가 필요해서였어요. 이 시절엔 물이 오염된 경우가 많아서 발효된 맥주가 물보다 안전했거든요. 이 전통이 어찌나 뿌리 깊은지 지금도 벨기에의 트라피스트 수도원 맥주가 세계적으로 유명해요. 시메이나 로슈포르 같은 이름을 들어보셨을 텐데 그 맥주들이 바로 중세 수도원 맥주 문화를 잇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서 제가 완전히 오해하고 있던 게 하나 있어요. 저는 수도원이 이렇게 힘 있는 곳이니 수도사들도 편하게 살았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웬걸 이들의 하루는 상상 이상으로 고됐어요. 수도사의 하루는 정해진 기도 시간을 중심으로 촘촘하게 짜여 있었는데 놀라지 마세요 새벽 두 시쯤부터 하루가 시작됐어요. 자정 무렵 시작하는 첫 기도를 시작으로 하루에 무려 여덟 번이나 정해진 시간에 기도를 드렸어요. 기도조차 자유롭게 하는 게 아니라 시간이 딱 정해져 있었던 거예요. 그 사이사이에 밭일도 하고 공부도 하고 책 베끼는 작업도 했고요. 심지어 밥 먹을 때도 편하게 못 먹었어요. 식사 중에는 누군가 성경을 소리 내어 읽었고 나머지는 조용히 들으며 먹어야 했거든요. 이렇게 빡빡한 일과를 매일 반복했다니 너무 힘들었겠어요.
기상 그리고 첫 번째 기도
아침 기도와 미사
필사 농사 공부 등 노동
식사 중에도 성경 낭독을 들으며
노동과 기도와 독서 반복
취침 그리고 다음 날 새벽 2시 반복
권력 있는 곳이니 편했을 거라던 제 생각은 완전히 빗나간 거였어요. 그런데 신기한 건 이런 절제된 생활 속에서 그 유명한 그레고리안 성가가 다듬어졌다는 거예요. 사실 저는 그레고리안 성가를 정말 좋아하거든요. 대학생 때 수업 시간에 처음 듣고 너무 좋아서 집에 와서 유튜브를 한참 찾아봤던 기억이 나요. 들으면 뭔가 마음이 경건하고 홀리해지는 그 느낌이 좋아요. 그렇게 고요하고 웅장한 성가가 이런 고된 하루하루 속에서 울려 퍼졌다니 새삼 뭉클해요. 참고로 그레고리안이라는 이름은 그레고리우스라는 교황의 이름에서 왔는데 실제로 그가 직접 다 만들었다기보다 후대에 그의 이름이 붙었다고 보는 시각이 많아요.
수도원이 지킨 지식과 여성들
앞에서 수도원이 그 시대 최고의 도서관이었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문득 궁금해지더라고요. 인쇄기도 없던 시절에 수도사들이 읽던 그 많은 책은 대체 어디서 났을까요. 답은 좀 놀라워요. 수도사들이 하나하나 손으로 베껴 쓴 거예요. 전부 셀프로 만든 책이었던 거죠.
사실 저희는 책 만드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생각해본 적이 없잖아요. 지금은 궁금한 게 있으면 바로 검색하면 되고 책도 마음만 먹으면 바로 살 수 있고 이북도 많아서 핸드폰으로 클릭 몇 번이면 읽을 수 있잖아요. 근데 이 시절엔 책을 늘리는 방법이 사람이 직접 옮겨 적는 것뿐이었어요. 수도사들은 필사실이라는 방에 앉아 원본을 보고 글자를 한 자 한 자 옮겨 적었어요. 책 한 권을 완성하는 데 몇 달씩 걸리는 건 예사였고요. 그런데 이 작업 환경이 생각보다 훨씬 열악했어요. 필사실에는 불을 켤 수가 없었거든요. 소중한 책과 양피지에 불이 옮겨붙을까 봐 촛불조차 금지였어요. 그래서 수도사들은 오직 해가 떠 있는 낮에만 작업할 수 있었어요. 심지어 햇빛을 최대한 오래 받으려고 필사실을 북쪽을 향하게 지어서 은은한 빛이 하루 종일 들어오게 했다고 해요. 촛불도 못 켜고 한 글자씩 베껴 썼다니 이거 완전 학생 때 벌로 적던 깜지 아닌가요ㅋㅋ 저는 어른 되고 글씨 쓸 일이 줄어서 그런지 요즘엔 조금만 적어도 팔이 아프던데 이걸 어떻게 다 옮겨 썼을지 상상이 안되더라구요.
이 고생스러운 작업 덕분에 하마터면 영영 사라질 뻔했던 그리스와 로마 시대의 고전들이 지금까지 전해질 수 있었다고해요. 전쟁이나 세월에 원본이 사라져도 수도사들이 베껴둔 사본이 남아 지식의 불씨를 이어준 거예요. 저렇게 열심히 필사해준 덕분에 우리가 저 먼 옛날 사람들의 이야기를 알 수 있는 거잖아요. 저처럼 옛날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궁금해하는 사람한테는 이분들이 진짜 은인이에요. 그런 점에서 참 고맙네요ㅎㅎ 세상을 등지고 조용히 살던 사람들이 정작 세상의 지식을 지켜낸 셈이니 생각할수록 묘해요.
그런데 이 지식의 공간에는 또 하나 중요한 의미가 있었어요. 바로 여성에게 열린 거의 유일한 배움의 문이었다는 거예요. 이 시절 여성은 제대로 교육받을 기회가 거의 없었어요. 그런데 수도원의 여성 버전인 수녀원은 달랐어요. 수녀원은 학교이자 도서관이었으니 이곳에 들어간 여성은 글을 배우고 지식을 쌓을 수 있었어요. 심지어 수녀원을 이끄는 자리에 올라 지도력을 발휘할 수도 있었고요. 그래서 어떤 역사가는 중세 수녀원을 여성을 위한 그 시대의 대학교였다고 표현하기도 해요. 이 부분이 저한테 되게 의외였어요. 로판 웹툰에서 수녀원은 악녀들이 벌받아서 쫓겨나는 곳이잖아요. 죄는 지었는데 신분이 높아서 죽일 수는 없으니 수녀원으로 보내버리고 그럼 악녀들이 인생 끝난 것처럼 괴로워하는 장면이 꼭 나오거든요. 근데 실제로는 오히려 제대로 교육받을 수 있는 좋은 기관이었다니 제가 알던 이미지랑 완전히 다르네요.
이걸 가장 잘 보여주는 인물이 예전에 음악 이야기에서 잠깐 나왔던 힐데가르트 폰 빙엔이에요. 힐데가르트는 어린 나이에 수녀원에 맡겨져 그곳에서 라틴어를 배우고 자랐어요. 여성이 라틴어를 배운다는 것 자체가 당시엔 아주 드문 일이었죠. 그렇게 배움을 쌓은 힐데가르트는 훗날 수녀원장이 됐고 음악과 의학과 신학을 넘나드는 놀라운 저술을 남겼어요. 심지어 교황에게 편지를 보내 자기 의견을 밝힐 정도의 영향력까지 가졌고요. 수녀원의 교육이 없었다면 힐데가르트도 자기 재능을 펼치지 못했을 거예요. 수녀원에서 배운 덕분에 그 능력을 세상에 꺼내 보인 거니까요. 정말 대단한 장소였네요.
이렇게 오늘 이야기를 정리하다 보니 새삼 느껴지는 게 있어요. 제가 상상하던 수도원이랑 수녀원이 실제 모습과 너무 달라서 그게 오히려 더 재밌었어요. 그리고 그동안 들려드린 중세 이야기들이 마녀사냥이든 결혼이든 음악이든 의학이든 결국 다 교회와 이어져 있더라고요. 중세를 이해하려면 교회를 먼저 알아야 한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어요.
자주 묻는 질문
네 1076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가 황제 하인리히 4세를 파문했고 이듬해 황제가 카노사 성문 앞에서 사흘간 참회한 끝에 사면받았어요.
당시엔 왕권을 무너뜨릴 만큼 무서웠어요. 파문당하면 신하들이 충성 맹세에서 풀려나 통치 근거 자체가 사라졌거든요.
성 베네딕토 규칙에 따라 하루 여덟 번 정해진 시간에 기도했어요. 자정 무렵 시작하는 첫 기도가 가장 길었답니다.
네 유럽 여러 박물관과 도서관에 소장돼 있어요. 아일랜드의 켈스의 서가 대표적인데 채색 삽화가 아주 섬세하기로 유명해요.
있어요. 벨기에 트라피스트 수도원 맥주가 세계적으로 유명한데 시메이나 로슈포르 같은 이름이 그 전통을 잇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