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살짝 무거운 이야기예요. 흑사병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해요. 흑사병은 역사 공부를 하다 보면 진짜 자주 나오는 주제인데요. 관련 글이나 영상을 볼 때마다 정말 무섭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ㅠㅠ 그런데 이번에 자료를 찾다 보니까 흑사병이 진짜 무서웠던 이유는 병 그 자체가 아니었더라구요.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해볼게요.

흑사병과 고해성사 없는 죽음
사람이라면 죽음이 가장 무서운 것 중 하나인 것 같아요. 저도 가끔씩 센치해질 때면 죽음에 대한 생각이 많아지는데 정말 두렵거든요.. 잠들기 전에 이런 생각 하다 보면 진짜 잠이 안 올 때도 있어요. 그런데 중세 사람들한테 죽음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죽음이랑 좀 달랐어요.
그 시대엔 어떻게 죽느냐가 정말 중요했거든요. 좋은 죽음이라는 개념이 따로 있었을 정도예요. 집에서 가족들이 다 지켜보는 가운데 신부님이 곁에 와서 마지막 고해성사를 받고 병자성사까지 해주는 거요. 그렇게 영혼을 차분히 준비시키고 떠나는 게 그 시대 사람들이 바라던 가장 이상적인 마지막이었어요. 죽음을 준비하는 법을 다룬 책까지 따로 나올 만큼 중요한 문제였고요.
신앙이 삶의 전부이던 시대라 이 마지막 의식이 진짜 중요했어요. 고해성사로 죄를 씻은 상태로 눈을 감아야 영혼이 안전하다고 믿었으니까요. 반대로 말하면 이 준비 없이 갑자기 떠나는 건 그냥 죽음이 아니라 영혼까지 위태로워지는 일이었어요. 지금 우리가 느끼는 죽음의 공포보다 한 겹 더 깊은 두려움이 있었던 셈이에요.
그런데 흑사병이 이 모든 걸 완전히 무너뜨렸어요. 전염 속도가 워낙 빨라서 환자 곁에 있는 것 자체가 곧 내 죽음이었거든요. 그러다 보니 가족들이 환자를 두고 도망치는 일이 벌어졌어요. 피렌체에서 흑사병을 직접 겪은 보카치오는 데카메론 서문에 형제가 형제를 버리고 삼촌이 조카를 외면했다고 적었어요. 심지어 부모가 자기 자식을 두고 떠나는 일까지 있었다고 기록했고요. 이런 일이 이탈리아 한 곳만의 이야기도 아니었어요. 스코틀랜드부터 러시아까지 유럽 곳곳에서 부모가 자식을 자식이 부모를 버렸다는 기록이 똑같이 남아 있어요.
아버지는 자식을 버렸고 어머니는 자녀를 외면했다. 형제자매마저 서로를 피했다. 죽어가는 자는 혼자였다.
— 보카치오 데카메론흑사병이 진짜 무섭긴 했나 봐요ㅠㅠ 부모가 자식을 두고 도망가기도 하고.. 너무한 것 같지만 그 시대에 흑사병은 진짜 재앙 같았을 거예요. 원인도 모르고 갑자기 다들 죽어나가니까 자식도 외면할 정도로 본능적으로 무서웠던 거겠죠...? 저도 지금은 제가 건강하고 편안하니까 부모가 자식을 버린다니 너무해ㅠㅠ 이러는 거지 극한의 상황이라면 진짜 어떤 선택을 할지 모르는 거잖아요.. 물론 지금으로서는 저는 우리 가족들 절대 포기 못 해요! 죽어도 같이 죽어야죠ㅠㅠㅠㅠ
더 무서운 건 신부님들이었어요. 임종을 지키러 갔다가 본인이 감염돼 죽는 일이 자꾸 반복되니까 아예 발길을 끊는 신부들이 생겨났어요. 시칠리아의 한 프란치스코회 수사는 신부들이 고해성사도 종부성사도 하러 오지 않았다고 남겼고 잉글랜드 캔터베리 대주교청의 한 서기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고 적었어요. 물론 반대로 끝까지 환자 곁을 지키다 목숨을 잃은 성직자도 정말 많았어요. 성직자 사망률이 유독 높았던 것도 그래서고요. 다만 겁에 질려 등을 돌린 신부들이 있었던 것도 분명한 사실이에요.
사실 부모가 자식도 버리고 떠나는 판에 신부님들이야 뭐ㅎㅎ 진짜 가족도 아니고 본인도 죽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 있었을 테니까 안 오는 신부들도 있었을 거 같아요. 그래도 죽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마음이 또 달라요. 단순히 혼자 죽는 것만 생각해도 무서운데 신앙이 가장 중요시되는 시대에서 마지막 고해성사조차 못 하다니 마지막까지 얼마나 두려워하면서 죽음을 맞이했을까요ㅠㅠ
흑사병과 코로나의 닮은 점
흑사병을 보다 보면 코로나19가 생각나는 건 저만 그런 게 아닐 거예요. 저도 그때 진짜 힘들었어요ㅠㅠ 다행히 저랑 가족들은 코로나19가 유행일 때 걸리지는 않았어요. 그렇지만 자가격리하고 친구들도 못 만나고 집에만 고립되어서 얼마나 심심하고 답답했는지 진짜 끔찍했죠ㅠㅠ 현대 의학이 이만큼 발달한 지금도 그게 얼마나 힘들었는지 기억하시는 분들 많으실 거예요.
그런데 중세 사람들은 왜 병에 걸리는지도 모르는 채로 병에 걸리고 혼자 외롭게 죽어갔어요. 그 공포가 얼마나 컸을지 지금으로선 상상하기도 어려운 것 같아요. 원인을 모르니까 손을 쓸 수도 없었고요. 그래도 사람들은 어떻게든 병을 막아보려고 방법을 찾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나온 게 바로 격리예요.
여기서 재밌는 사실 하나 짚고 갈게요. 흑사병 하면 검역을 처음 만든 도시로 베네치아를 떠올리는 분들이 많은데 사실 최초는 베네치아가 아니에요. 세계에서 처음으로 검역을 법으로 만든 곳은 라구사예요. 지금의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고요. 1377년에 라구사 의회가 흑사병이 도는 지역에서 온 사람은 먼저 격리부터 하고 도시에 들어오라는 법을 통과시켰어요. 이게 인류 최초의 공식 검역법이에요.
처음엔 격리 기간이 30일이었어요. 이걸 이탈리아어로 트렌티노라고 불렀는데 트렌타가 30을 뜻하거든요. 그런데 30일로는 부족하다고 봐서 육로로 오는 사람들한테는 40일로 늘렸어요. 40을 뜻하는 이탈리아어가 콰란타인데 여기서 바로 검역을 뜻하는 영어 단어 쿼런틴이 나온 거예요. 우리가 지금 쓰는 검역이라는 말의 뿌리가 700년 전 흑사병에서 나온 셈이죠.
오 근데 진짜 그 시대랑 지금이랑 비슷한 부분이 많네요! 특히 격리는 진짜 비슷해요ㅎㅎ 우리도 코로나 때 일주일씩 격리하고 그랬잖아요. 근데 일주일 격리하는 것도 되게 힘들었는데 40일을 격리했다고요? 어휴 넘 답답하고 힘들었을거같아ㅠㅠ
검역을 뜻하는 영어 쿼런틴(Quarantine)은 40을 뜻하는 이탈리아어 콰란타(quaranta)에서 왔어요. 흑사병 때 라구사에서 사람들을 40일간 격리하던 데서 나온 말이에요.
왜 하필 40일이었을까 궁금하실 텐데요. 여기엔 종교적인 의미도 있었어요. 노아의 홍수가 40일 동안 내렸고 예수님이 광야에서 40일을 지냈잖아요. 중세 기독교인들한테 40일은 몸과 마음을 정화하는 상징적인 기간이었어요. 그래서 격리 기간에도 자연스럽게 이 40일이 들어온 거죠.
라구사는 흑사병이 도는 배가 오면 사람들을 근처 무인도나 지정된 마을에 40일 동안 머물게 했어요. 그리고 이 방법이 진짜로 통했어요. 라구사는 이후 수십 년 동안 이웃 도시들보다 훨씬 적은 피해로 흑사병을 넘겼거든요. 이 작은 항구 도시가 만든 방법이 나중에 유럽 전체로 퍼졌고요.
아 아예 의심되는 사람들끼리 따로 모아놓은 거구나. 오오 그러면 아직 안 걸린 사람들한테 옮기는 걸 좀 피할 수 있었겠네요~ 지금 생각하면 당연한 방법 같은데 원인도 모르던 시절에 이걸 떠올렸다는 게 은근 대단한 것 같아요.
격리만 한 게 아니에요. 라구사에서는 물건을 사고팔 때도 조심했어요. 가게 주인이 손님한테 받은 동전을 바로 만지지 않고 물이 담긴 그릇에 담가서 받았다고 해요. 돈에 병이 묻어 있을까 봐 그런 거였죠.
근데 돈에 병이 묻어있을까 봐 물에 담가서 받았다는 거ㅎㅎ 진짜 요즘이랑 비슷하네요. 그때 우리도 하루에도 몇 번씩 비누로 손 씻고 손 소독하고 그랬잖아요. 그런 게 이렇게 옛날부터 시작된 거였다니 신기해요.
지금 우리가 코로나 때 했던 자가격리 사회적 거리두기 입국 제한 이런 게 사실 다 흑사병에서 원형이 만들어진 거예요. 그때 사람들이 원인도 모른 채 몸으로 부딪혀가며 찾아낸 방법이 이렇게 발전해서 요즘 전염병이 돌 때 우리를 지켜주는 시스템이 된 거죠. 700년 전 방법이 지금도 그대로 쓰이고 있다는 게 진짜 신기하지 않나요.

흑사병 시대의 매장 공포
이 마지막 이야기는 저도 이번에 찾아보면서 통념이 확 깨진 부분이에요. 흑사병 하면 떠오르는 무서운 장면들 있잖아요. 시체를 구덩이에 마구 던져 넣고 산 사람이 죽은 줄 알고 묻히고 그래서 관에 종을 달아뒀다더라 하는 이야기요. 저도 예전엔 이게 다 흑사병 때 일인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하나씩 파보니까 사실이랑 꽤 달랐어요.
먼저 관에 종 달았다는 이야기부터요. 혹시 살아있으면 줄을 당겨서 종을 울리라고 관에 장치를 달았다는 그 이야기 많이들 들어보셨을 거예요. 근데 이건 흑사병 때 물건이 아니에요. 산 채로 묻히는 걸 막는 안전관은 18세기에서 19세기 유럽에서 유행한 발명품이거든요. 생매장 공포가 진짜 정점을 찍은 것도 19세기 콜레라가 돌던 시절이에요. 흑사병은 14세기 일이니까 400년도 더 차이가 나요. 흑사병이랑 엮여서 도는 이야기지만 사실은 한참 뒤에 나온 물건인 거죠.
으아 관에 종 달았다는 거 저는 진짜 끔찍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흑사병 때 일은 아니었구나ㅠㅠ 근데 시대가 어디가 됐든 너무 끔찍한 발명품이에요ㅠㅠㅠㅠ 진짜 산 채로 묻히는 경우가 있었다는 거잖아요.. 생각만 해도 너무 무서워요.
| 흔히 아는 이야기 | 실제 밝혀진 사실 |
|---|---|
| 관에 종을 달아 생매장을 막았다 | 안전관은 18~19세기 발명품 흑사병과 400년 이상 차이 |
| 시체를 구덩이에 마구 던져 묻었다 | 런던 발굴 결과 줄 맞춰 정성껏 눕혀 묻음 관도 사용 |
| 검역은 베네치아가 처음 만들었다 | 세계 최초 공식 검역법은 1377년 라구사 |
그럼 시체를 구덩이에 아무렇게나 던져 넣었다는 이미지는 맞을까요. 이것도 생각보다 달라요. 런던에는 흑사병 사망자를 묻으려고 급하게 만든 공동묘지가 있었는데요. 이스트 스미스필드라는 곳이에요. 1980년대에 발굴해보니까 시신을 마구잡이로 던진 게 아니라 줄을 맞춰서 하나하나 정성껏 눕혀 묻었더라구요. 심지어 관에 넣어 묻은 경우도 많았고요. 하루에 200명씩 묻어야 하는 상황에서도 최대한 질서를 지키려고 한 흔적이 남아 있었어요. 이건 그냥 아무렇게나 버린 구덩이가 아니라 나라가 나서서 관리한 공식 매장지였던 거예요.
그래도 흑사병으로 죽은 사람들은 관에 넣어서 제대로 묻어주긴 했구나 싶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싶어요.. 런던에만 이런 공식 매장지가 여러 곳 있었어요. 서쪽에도 하나 더 있었는데 여기엔 무려 2만 명 가까이 묻혔을 거라고 봐요. 주교와 왕까지 나서서 만든 곳이었고요. 피렌체 쪽 기록을 보면 커다란 구덩이에 시신을 층층이 쌓고 그 사이에 흙을 얇게 덮는 식으로 묻었다고 해요. 마구잡이로 던진 게 아니라 나름의 방식이 있었던 거죠.
그런데 여기서 진짜 무서운 지점이 나와요.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질서를 지키려고 애썼다는 건 반대로 말하면 제대로 묻히는 게 그만큼 중요했다는 뜻이거든요. 그런데 죽는 사람이 너무 많으니까 그 바람이 결국 지켜지지 못했어요. 보카치오는 신부가 시신 하나를 묻으러 갔다가 어느새 뒤에 관이 예닐곱 개씩 따라붙어 있었다고 적었어요. 우는 사람도 촛불도 애도하는 사람도 없이 죽은 사람이 죽은 염소만큼도 대접받지 못했다고요.
결국 이게 흑사병 시대의 진짜 매장 공포였어요. 앞에서 혼자 외롭게 죽는 이야기를 했잖아요. 거기서 끝이 아니라 죽은 뒤에도 이름 없이 낯선 사람처럼 무더기로 묻히는 거요. 가족의 배웅도 없고 마지막 기도도 없이요. 좋은 죽음을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던 사람들한테 이건 두 번 죽는 거나 마찬가지였을 거예요.
저 시대에 진짜 본인이 왜 죽는지도 모르고 그 공포 속에서 가족들마저 떠나가고.. 그렇게 죽어간 사람들은 얼마나 무서웠을까요ㅠㅠ 지금 우리가 아프면 병원에 가고 가족들 곁에서 치료받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새삼 느끼게 되네요.
자주 묻는 질문
흑사병 검역은 어디서 처음 시작됐나요?
세계 최초의 공식 검역법은 1377년 라구사 그러니까 지금의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에서 만들어졌어요. 흔히 아는 베네치아가 아니에요.
쿼런틴이 40일이라는 뜻인가요?
맞아요 40을 뜻하는 이탈리아어 콰란타에서 나온 말이에요. 처음엔 30일이었다가 육로 여행자에게 40일로 늘면서 이 단어가 굳어졌어요.
관에 종 다는 장치가 흑사병 때 있었나요?
아니에요. 산 채로 묻히는 걸 막는 안전관은 18세기에서 19세기에 유행한 발명품이라 흑사병이랑은 400년 넘게 차이가 나요.
흑사병 시체는 구덩이에 마구 던졌나요?
런던 이스트 스미스필드를 발굴해보니 시신을 줄 맞춰 정성껏 눕혀 묻었고 관에 넣은 경우도 많았어요. 생각보다 질서 있는 공식 매장지였답니다.
흑사병과 코로나는 뭐가 비슷한가요?
격리와 검역 사회적 거리두기 같은 방역 개념이 다 흑사병 때 원형이 만들어졌어요. 700년 전 방법이 지금도 쓰이는 셈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