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나리자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근데 그 그림의 모델이 누구인지 정확히 아는 사람도 거의 없습니다. 5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미스터리가 풀리지 않은 채로 남아있는 이 작품, 그리고 그 작품을 그린 사생아 출신 천재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진짜 이야기를 오늘 풀어보겠습니다.

15세기 피렌체 풍경 —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태어나고 자란 그 시대의 공간입니다
모나리자의 모델은 누구였을까, 풀리지 않은 미스터리
모나리자만큼 한 작품을 둘러싸고 이렇게 많은 추측이 쌓인 그림은 드뭅니다. 저는 그림에 대해 하나도 모르는데도 어릴 때부터 가장 많이 배웠던 그림이 모나리자였던 것 같아요. 우리나라 노래 가사에도 등장하고ㅎㅎ 모나리자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 같거든요. 근데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이 그림이 왜 이렇게 유명할까 궁금하긴 해요. 왜냐하면 다빈치 작품 중에 더 멋있어 보이는 작품도 많거든요.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가설은 1550년 화가 조르조 바사리가 쓴 미술가 열전에 나온 내용인데, 피렌체의 상인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가 자기 부인 리자 게라르디니의 초상화를 의뢰했다는 거예요. 실제로 모나리자(Mona Lisa)라는 이름 자체가 이탈리아어로 '리자 부인'이라는 뜻이고, 이탈리아·프랑스에서는 지금도 모델의 이름을 따서 '라 조콘다'라고 부릅니다.
근데 이 설에 반박하는 의견도 많습니다. 바사리는 조콘도 부인을 직접 만난 적도 없고, 그림 원본을 본 적도 없다는 게 첫 번째 의문점이에요. 더 근본적인 의문은 이거예요. 만약 상인이 부인의 초상화를 의뢰한 거라면, 완성된 그림을 왜 의뢰인에게 넘기지 않고 다빈치가 죽을 때까지 직접 보관했을까요? 이 의문 때문에 다빈치 자신을 여성으로 묘사한 자화상이라는 설, 심지어 그의 제자 살라이를 여성화해서 그렸다는 설까지 등장했습니다. 흥미롭게도 2010년 인공지능으로 다빈치의 자화상과 모나리자의 얼굴을 비교 분석한 연구에서 두 얼굴이 닮았다는 결과가 나오면서 이 가설에 다시 힘이 실리기도 했어요.
또 다른 흥미로운 가설은 모델이 다빈치의 어머니였을 거라는 추측입니다. 다빈치는 사생아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어머니와 떨어져 자랐는데, 평생 곁에 두고 싶었던 그리운 얼굴을 모나리자에 투영했을 거라는 해석이에요. 모나리자 모델이 진짜 누구일까 싶어서 여기저기서 모나리자를 다루는 글이나 영상을 많이 봤는데, 다들 명확하게 정의를 내리지 못한다는 게 너무 신기해요! 진짜 그 시대로 돌아가서 다빈치한테 '이건 누구를 그린 건가요?' 하고 직접 물어보고 싶어지네요ㅠㅠ 어떤 가설이 맞든, 공통된 결론은 하나입니다. 모나리자는 처음부터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그린 그림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거예요.
사생아로 태어나 천재가 된 다빈치의 어린 시절
다빈치는 1452년 4월 15일, 피렌체 공증인 피에로와 평민 출신 여성 카테리나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23살의 야심 많은 공증인이었고, 어머니는 신분이 낮고 지참금도 없는 가난한 집안 출신이라 결혼으로 이어지지 못했어요. 흥미로운 건 다빈치가 태어난 지 8개월 만에 아버지가 16살의 부유한 공증인 딸과 정식으로 결혼했다는 점입니다. 가문에 걸맞은 결혼을 서둘러 치른 거죠. 다빈치는 처음엔 어머니와 함께 지냈는데, 늦어도 5살 무렵에는 친할아버지 집으로 옮겨가서 자랐습니다. 법적으로는 사생아 신분을 유지했지만 가문의 구성원으로는 인정받은 셈이에요.
근데 이 사생아 신분이 다빈치의 진로를 완전히 결정해버렸습니다. 아버지가 속한 판사·공증인 길드는 원칙적으로 사생아의 가입을 받아주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다빈치는 아버지처럼 공증인이 되는 길 자체가 막혀 있었던 거예요. 정규 라틴어 교육도 받지 못해서 본인을 '문맹'이라고 칭했을 정도였고, 대신 읽기·쓰기·기초 셈법을 가르치는 산수 학교에 다녔을 가능성이 높다고 해요. 정규 교육에서 배제됐기 때문에 오히려 장인, 그중에서도 화가의 길을 선택하게 된 거죠. 어떻게 보면 다빈치는 사생아라는 신분 때문에 화가의 길을 가게 된 거네요. 이렇게 엄청난 천재가 어린 시절에는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못한 사생아 신분이었다는 게 신기해요. 아스팔트 사이에 피어난 식물을 보는 느낌이에요ㅎㅎ 열악한 상황을 이겨내고 천재로 두각을 나타냈으니까요. 만약 사생아가 아니었다면 다빈치는 평범한 공증인으로 평생을 보냈을 수도 있다는 거예요.
다빈치의 생모를 둘러싼 미스터리도 최근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2014년에는 모나리자의 모델이 다빈치 어머니였던 중국인 노예라는 설이 등장했는데, 이듬해 옥스퍼드의 다빈치 연구자 마틴 켐프 교수가 세금 기록과 거래 내역을 근거로 이 설을 반박했어요. 그런데 2023년, 이번엔 나폴리대 카를로 베체 교수가 피렌체 기록보관소에서 직접 발견한 노예 해방 문서를 공개하면서 생모가 중앙아시아 코카서스 출신 노예였을 가능성을 다시 제기했습니다. 다만 이 주장은 학술 논문이 아니라 소설 형식으로 발표됐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로 확정됐다고 보기는 아직 어려워요. 생모를 둘러싼 기록들이 최근까지도 이렇게 계속 연구되고 있다는 게 신기하네요. 진짜 정체가 무엇인지, 모나리자가 누구인지, 미스터리한 부분이 정말 많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르네상스 시대 화가의 작업실 — 다빈치가 작품을 그렸던 그 시절의 공간입니다
미완성으로 남은 다빈치의 작품들과 완벽주의
다빈치는 평생 8점 정도만 보편적으로 그의 작품이라고 인정받을 정도로 완성작이 적은 화가입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너무 완벽주의자였거든요. 다빈치가 엄청난 완벽주의자라서 미완성된 그림이 많다는 건 미술 시간에도 들어본 것 같아요. 새로운 기법을 끝없이 실험하고, 만족할 때까지 작업을 미루는 습관 때문에 수많은 작품이 미완성으로 남았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1503년 피렌체 시청 벽화로 의뢰받은 '앙기아리 전투'예요. 옆 벽에서는 28살의 미켈란젤로가 '카시나 전투'를 그리고 있었는데, 두 거장의 작품 모두 결국 완성되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다른 화가의 모사본으로만 그 흔적이 남아 있을 뿐이에요.
심지어 가장 유명한 완성작인 '최후의 만찬'마저 완벽주의 때문에 비극적인 결말을 맞았습니다. 당시 벽화는 보통 프레스코 기법으로 그렸는데, 이건 회반죽이 마르기 전에 빠르게 완성해야 하는 방식이라 수정이 거의 불가능했어요. 근데 다빈치는 천천히 작업하면서 수정도 마음껏 할 수 있는 템페라 기법을 고집했습니다. 문제는 템페라가 프레스코보다 훨씬 빨리 변질된다는 거였어요. 결국 다빈치가 죽기도 전에 이미 그림이 손상되기 시작했고, 지금 우리가 보는 최후의 만찬은 수차례 복원을 거쳤지만 원래의 색감과 디테일은 상당 부분 사라진 상태입니다.
같은 천재지만 모차르트랑 비교가 되는 부분이에요. 모차르트는 이미 머릿속에서 완성된 악보를 슥슥 그리기만 해서 수정한 자국도 없는 깨끗한 악보를 만들었는데, 다빈치는 수정하고 덧칠하고 계속해서 수정하느라 완성을 못 시켰으니까요. 완벽을 추구하려던 선택이 오히려 작품을 더 빨리 망가뜨린 셈이죠.
모나리자도 사실 이 완벽주의의 결과물이에요. 보통 화가들은 그림을 다 완성한 다음 한 번에 광택 코팅을 입히는데, 다빈치는 그림의 일부를 그리고 코팅하고 다시 그리고 코팅하는 방식을 반복했다고 알려져 있어요. 그러다 보니 모나리자는 공식적으로는 완성작으로 분류되지만, 다빈치가 1503년부터 죽기 직전인 1519년까지 거의 16년 동안 손에서 놓지 않고 계속 수정한 그림이기도 합니다. 어떤 학자들은 이런 이유로 모나리자조차 진짜 미완성작이라고 봐야 한다고 주장해요. 다빈치 같은 천재가 멋진 작품들을 더 많이 남겨줬으면 좋았을 텐데, 제대로 완성된 작품은 몇 점 없다는 게 너무 아쉬워요ㅠㅠ 평생을 발명하고 연구하고 그림을 고치는 데 쓴 사람이었으니, 다빈치한테는 '완성'이라는 단어 자체가 큰 의미가 없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