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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를 전공하면서 제일 많이 쳐본 작곡가가 누구냐고 물으면 저는 단연 바흐라고 대답합니다. 인벤션부터 평균율 클라비어곡집까지, 전공자라면 피할 수 없는 필수 코스거든요. 그런데 그 음악을 만든 사람이 살아있을 때 그냥 동네 교회 오르가니스트 취급을 받았고, 사후 100년 가까이 거의 잊혀졌다는 사실은 공부하면 할수록 정말 납득이 안 됐습니다. 오늘은 제가 음악을 하면서 알게 된 바흐의 실제 이야기를 데이터와 함께 풀어보겠습니다.
팩트로 보는 바흐 청년 시절 — 근엄한 이미지의 완전한 반전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저한테 바흐는 초상화 속 그 무뚝뚝한 얼굴, 경건한 교회음악의 상징이었거든요. 근데 자료를 파고들면 들수록 20대의 바흐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더라고요. 1703년, 스무 살의 바흐는 아른슈타트 교회 오르가니스트로 재직 중이었는데, 같이 일하던 바순 연주자에게 일부러 난이도 높은 악보를 건네고 연주 실력을 공개적으로 비웃었습니다. 그 연주자가 결투를 신청했다는 기록이 실제로 남아 있습니다. 음악의 아버지가 동료와 길거리 싸움 직전까지 갔다는 거죠. 다른 사람의 연주를 못한다고 비웃은 건 솔직히 좀 너무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더 구체적인 사건이 있습니다. 1705년, 18살의 바흐는 당시 북유럽 최고의 오르간 연주자로 평가받던 디트리히 북스테후데의 연주를 듣기 위해 뤼베크까지 걸어서 이동했습니다. 편도 거리가 약 450km. 4주 휴가를 내고 떠났지만 돌아온 건 4개월 뒤였습니다. 저도 북스테후데 음악을 좋아하는데, 그 음악에 꽂혀서 450km를 도보로 이동한 바흐의 열정은 진짜 다른 차원이라고 생각합니다. 바흐도 저랑 같은 음악을 좋아했었구나 싶어서 묘하게 반갑기도 했습니다. 당연히 교회 징계위원회에 불려갔고, 기록에 남은 징계 사유는 무려 다섯 가지였습니다.
- 4주 휴가를 4개월로 무단 연장한 것
- 오르간 연주를 지나치게 화려하게 해 신도들을 혼란스럽게 한 것 — 여기서 "화려한 연주"란 당시 루터교 예배 규범을 벗어난 즉흥 장식 기법, 즉 오르나멘트(ornament) 과용을 의미합니다
- 성가를 규정보다 지나치게 길게 연주한 것
- 단원들과 잦은 마찰을 일으킨 것
- 낯선 여성을 오르간 연주대로 불러 사적인 음악을 연주한 것 — 이 여성이 훗날 바흐의 첫 번째 아내가 된 마리아 바르바라였습니다
젊은 시절의 바흐는 정말 거침없었던 것 같습니다. 에피소드 하나하나가 다 이렇게 강렬하니까요. 마리아 바르바라 사후, 바흐는 1721년 안나 막달레나와 재혼했고, 두 아내 사이에서 총 20명의 자녀를 두었습니다. 이 중 살아남은 자녀는 절반이 조금 넘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땐 위생 관념도 없었고 의료도 발달되지 않았으니 어쩔 수 없었겠다 싶긴 하지만, 그래도 부모로서 감당해야 했던 무게는 상당했을 겁니다. 생존한 자녀 중 카를 필리프 엠마누엘 바흐(C.P.E. Bach)는 고전파 음악의 문을 연 작곡가로 평가받습니다. 저도 아이들 레슨에서 C.P.E. 바흐 곡을 지금도 씁니다. 흥미로운 건 바흐 생전에 모차르트나 베토벤이 "바흐"를 극찬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실제로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가 아니라 그의 아들을 가리킨 칭찬이었다는 설이 일반적이라는 점입니다. 다만 정확히 어느 아들을 가리킨 것인지는 출처마다 조금씩 갈립니다. 아버지보다 아들이 먼저 유명했던 시기가 있었다는 게 지금 기준으로 보면 참 신기하게 느껴집니다.
종교음악의 절정과 100년 만의 재발견 — 멘델스존이 없었다면
바흐가 1723년 라이프치히 성 토마스 교회의 칸토르(Cantor)로 부임한 것은 그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칸토르란 당시 독일 루터교 교회에서 음악 전반을 총괄하는 직책으로, 작곡·지휘·연주·음악 교육을 모두 담당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바흐는 매주 예배를 위한 칸타타(Kantate)를 새로 작곡해 공급했습니다. 칸타타란 성경 본문이나 찬송 가사를 바탕으로 독창·합창·기악을 결합한 교회 음악 형식으로, 바흐는 이를 약 200곡 이상 남겼습니다. 제가 공부하면서 이 숫자를 처음 봤을 때 진짜 멍했습니다. 매주 새 곡이라는 게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작업량이라는 게, 직접 칸타타 악보를 쳐본 사람이라면 더 실감이 가실 겁니다. 얼마나 천재였길래 이게 가능했는지 새삼 놀랍습니다.
이 시기 바흐의 대표작인 마태수난곡(Matthäus-Passion)은 연주 시간이 약 3시간에 달하는 대규모 성악·기악 작품입니다. 마태복음의 예수 수난 이야기를 두 개의 합창단과 오케스트라로 풀어낸 이 곡은 지금도 부활절 시즌마다 전 세계 주요 음악 기관에서 연주됩니다(출처: 바흐 아르히프 라이프치히). 저는 이 곡을 처음 들었을 때 그레고리안 성가를 들을 때와 비슷한 감각을 느꼈습니다. 낭만시대처럼 화려하거나 감정이 폭발하는 스타일은 아닌데, 그 절제된 구조 안에서 뭔가 근원적인 게 있달까요. 제가 그런 음악 스타일을 좋아하는 편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흥미로운 건, 종교음악에 이렇게 평생을 바친 바흐가 1730년대에 들어서면서 교회 음악에 대한 흥미를 점점 잃어갔다는 점입니다. 교회 측과의 갈등이 잦았고 칸토르로서의 권한이 계속 제한당하는 상황에 지쳤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흐도 결국 사람인데, 말년에 지칠 만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후반부에는 콜레기움 무지쿰이라는 시민 음악 모임을 이끌며 종교음악이 아닌 기악곡에 더 집중하게 됩니다.
바흐가 사망한 1750년 이후 상황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당시 음악계는 이미 고전파 양식으로 빠르게 넘어가고 있었고, 바흐의 대위법(Counterpoint) 중심 음악은 구시대적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대위법이란 둘 이상의 독립된 선율이 동시에 진행되면서 서로 조화를 이루는 작곡 기법으로, 바흐의 푸가(Fuge)가 그 정점입니다. 전공 시절 푸가를 분석하면서 이 구조가 얼마나 치밀한지 직접 확인한 적이 있는데, 이걸 "유행이 지났다"는 이유로 무시했다는 게 지금 생각해도 말이 안 됩니다. 실제로 모차르트는 바흐의 악보를 따로 구해 연구했고, 베토벤은 평균율 클라비어곡집(Das Wohltemperierte Klavier)을 보며 큰 영향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이란 24개의 장·단조 모든 조성으로 작성된 전주곡과 푸가 모음집으로,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조율 체계를 전제로 한 작품집입니다(출처: IMSLP 국제 악보 라이브러리). 대중이 잊는 동안 음악가들은 결코 놓지 않았던 거죠.
결정적인 전환은 1829년에 옵니다. 작곡가 펠릭스 멘델스존이 마태수난곡을 사후 약 80년 만에 공개 연주회로 올렸고, 이 공연이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키면서 바흐 부흥 운동이 본격화됩니다. 제가 학부 시절에 이 이야기를 처음 접했을 때 멘델스존한테 진심으로 고마웠습니다. 그가 없었다면 저는 바흐의 푸가를 연주해볼 기회 자체가 없었을 수도 있으니까요. 공부하면 할수록 바흐를 음악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유가 이해됐고, 실제로 학부 커리큘럼에서도 다른 작곡가들은 음악사 흐름 안에서 함께 묶어 가르쳤는데 바흐는 바흐만 따로 빼서 학기 단위로 가르칠 만큼 음악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달랐습니다. 그걸 멘델스존이 다시 살려냈다는 게 지금 생각해도 참 신기방기합니다.
바흐 생애를 쭉 들여다보면 한 가지가 계속 마음에 걸립니다. 결투 직전의 혈기왕성한 청년이었고, 매주 새 곡을 써내는 초인적인 작업량을 소화했고, 20명의 자녀를 낳고 절반을 먼저 보낸 아버지였던 사람이, 살아있는 동안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다는 사실이요. 위대한 음악은 결국 시대를 넘어 살아남는다는 말을 이론으로는 알고 있었는데, 바흐의 경우는 그걸 숫자와 기록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어서 더 실감이 납니다. 바흐를 아직 인벤션이나 평균율 정도만 접해보셨다면, 마태수난곡 전곡을 한 번 시간 내서 들어보시길 권합니다. 3시간짜리 음악이 지루하지 않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직접 경험해보시면 알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