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여성 이야기가 자주 나오는데요. 그동안 이 블로그에서도 앤 불린, 엘리자베스 1세, 메리 여왕, 마녀사냥 피해자들 이야기를 했잖아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중세 여성들은 정말 아무 선택권이 없었을까요? 다들 그냥 시키는 대로 살았을까요? 찾아보니까 의외로 그렇지 않은 경우들이 꽤 있었어요.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수녀원이 등장하는 장면을 보면요. 보통 벌을 받거나 쫓겨난 여성이 "수녀원으로 보내버린다!"는 식으로 나오잖아요. 그래서 평생 외롭게 고생하는 곳이라는 이미지가 있었는데, 중세에서는 달랐어요. 수녀원이 오히려 여성이 공부하고 권력을 가질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공간이었거든요.
평민 여성이든 귀족 여성이든 결혼하면 남편의 재산이 됐어요. 근데 수녀원에 들어가면 달랐어요. 수녀원장은 상당한 권력을 가졌어요. 넓은 토지를 관리하고, 소속 수녀들을 지휘하고, 교회 내에서 발언권도 있었어요. 글을 배울 수 있는 것도 수녀원이 거의 유일했고요. 결혼 대신 수녀원을 선택하는 여성들이 있었던 이유가 여기 있어요.
이건 처음 알았을 때 진짜 신기했는데요. 중세에 여성 의사가 있었어요. 가장 유명한 인물이 12세기 이탈리아의 트로툴라(Trota of Salerno)예요. 살레르노 의과대학에서 활동한 여성 의사로, 산부인과와 여성 질환에 관한 책을 썼어요. 그 책이 수백 년 동안 유럽 의학 교육에 쓰였답니다.
물론 이런 경우가 흔한 건 아니었어요. 여성이 공식적으로 의사가 되기 어려운 시대였거든요. 근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인물들이 존재했다는 게 흥미롭지 않나요. 불가능한 시대에 자기 길을 만들어간 사람들이었던 거예요.
역사는 그들을 지우려 했지만, 그들은 기록을 남겼습니다.
— 중세 여성 역사 연구자들의 공통된 결론
중세 도시에는 길드라는 직업 조합이 있었어요. 대장장이, 직물업자, 제빵사 같은 사람들이 모여 만든 조합인데, 여기에 여성들도 참여했어요. 특히 직물 산업에서 여성 장인들이 꽤 활발하게 활동했답니다. 남편이 죽으면 가업을 이어받아서 길드를 운영하는 여성들도 있었고요.
하루 일상 글에서 귀족 여성이 영지를 관리했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사실 평민 여성들도 나름의 방식으로 경제적 역할을 했던 거예요. 이렇게 보면 어떤 부분에서는 조선시대 여성들보다 자유로운 부분도 있었던 것 같기도 해요. 물론 단순 비교는 어렵지만요.
토지 관리, 수녀 지휘, 교회 내 발언권. 당시 여성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공식적인 권력이었어요
트로툴라 같은 인물이 실존했어요. 공식 교육은 어려웠지만 실력으로 자리를 잡은 경우도 있었어요
남편 사망 후 가업을 이어받거나 독립적으로 활동한 여성 장인들이 있었어요
남편이 전쟁에 나간 동안 성 전체를 혼자 운영했어요. 사실상 CEO 역할이었답니다
마녀사냥 글에서 혼자 사는 여성이 표적이 되기 쉬웠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여기에 역설적인 면이 있어요. 혼자 산다는 게 보호자 없이 독립적으로 살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거든요. 약초를 잘 아는 여성, 산파 역할을 하는 여성, 토지를 상속받은 미혼 여성. 이 사람들이 마녀로 몰린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너무 독립적이어서였어요.
뒤집어 보면 그 시대에도 그런 삶을 선택한 여성들이 있었다는 거예요. 결혼 대신 자기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여성들이요. 물론 위험했어요. 근데 그럼에도 그 길을 걸어간 사람들이 있었다는 게 흥미로운 것 같아요.
12세기 독일 수녀원장 힐데가르트는 신학, 음악, 의학, 자연과학을 아우르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어요. 교황과 황제에게 편지를 쓸 만큼 당대에 엄청난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었어요. 수녀원이라는 공간이 그녀에게 어떤 가능성을 열어줬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랍니다.
물론 이런 이야기들이 중세 여성이 자유로웠다는 뜻은 아니에요. 대부분의 여성은 여전히 아버지나 남편의 결정에 따라야 했고, 재산권도 제한적이었고, 교육받을 기회도 극히 드물었어요.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이 그 시대엔 없었던 거예요.
다만 역사를 공부하면서 느끼는 게, 어떤 시대든 그 제약 안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살아간 사람들이 항상 있었다는 거예요. 완전한 자유는 없었어도, 틈새를 찾아 살아간 여성들이 있었고 그 이야기가 지금 우리한테 전해지고 있다는 게 의미 있는 것 같아요.
엘리자베스 1세, 앤 불린, 메리 여왕 이야기를 하다가 여기까지 흘러왔는데요. 결국 어느 시대든 자기 자리에서 버텨낸 사람들이 역사를 만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게 왕이든, 수녀원장이든, 이름 없는 장인이든요.
다음엔 좀 가볍게 중세 시대 사람들이 어떻게 시간을 보냈는지 얘기해볼게요. 축제, 놀이, 술집 문화까지 — 힘든 시대에도 즐기는 방법은 있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