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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천무후 (여황제, 인재 등용, 글자 없는 비석)

by 미니55 2026. 7. 9.

중국 5000년 역사에서 스스로 황제 자리에 오른 여성은 딱 한 명뿐이에요. 바로 측천무후예요. 그것도 예순일곱이라는 나이에 말이죠. 저도 사실 측천무후를 잘 몰랐는데 알아볼수록 드라마로 만들면 말도 안 된다고 욕먹을 것 같은 인생이더라고요. 오늘은 측천무후가 어떻게 중국 유일의 여황제가 됐는지, 그녀의 파격적인 인재 등용은 어땠는지, 그리고 무덤 앞에 남긴 글자 없는 비석의 비밀까지 하나씩 풀어볼게요.

 

 

당나라 시대 궁궐 — 측천무후가 여황제로 군림했던 무대입니다

 

측천무후가 중국 유일의 여황제가 된 과정

측천무후는 중국 5000년 역사에서 유일하게 스스로 황제 자리에 오른 여성이에요. 중국 역사에서 실권을 쥐고 나라를 주무른 여성은 여럿 있었지만, 남편이나 아들 뒤에서 수렴청정을 한 게 아니라 본인이 직접 황제로 즉위해서 아예 새 나라를 세운 사람은 측천무후가 유일무이해요. 이게 얼마나 파격적인 일이었냐면, 당시 중국은 여성이 정치에 나서는 것 자체를 극도로 꺼리던 시대였거든요. 드라마도 이렇게 만들면 말도 안 된다고 욕먹을 것 같은 스토리인데, 이게 실화예요ㅋㅋ

측천무후는 624년 당나라 개국공신인 아버지와 수나라 황족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어요. 14살 때 당 태종의 후궁으로 궁에 들어갔는데, 태종이 세상을 떠나자 관례에 따라 비구니가 되어 절로 보내졌어요. 보통 여기서 인생이 끝났을 텐데, 측천무후는 달랐어요. 평범한 사람이라면 이제 내 인생은 끝이구나 하고 순응하며 살았을 텐데, 태종의 아들인 다음 황제 고종의 눈에 들면서 다시 궁으로 돌아온 거예요. 아버지의 후궁이었다가 아들의 후궁이 된 셈인데, 이건 무슨 막장 드라마인가 싶기도 해요. 지금 기준으로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되는데, 당시 유목민족의 영향이 남아있던 당나라에서는 종종 있던 일이었다고 해요.

궁으로 돌아온 측천무후는 빠르게 권력을 키웠어요. 결국 655년에는 황후 자리까지 올랐어요. 원래 있던 황후를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한 건데, 집안이 별로 높지 않다는 이유로 원로대신들이 강하게 반대했지만 측천무후는 이들을 하나씩 실각시키면서 기어이 황후가 됐어요. 후궁으로 들어가서 이렇게까지 권력을 장악했다는 게 진짜 보통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엄청나게 똑똑했던 거죠. 남편 고종이 건강이 안 좋아지자 측천무후가 사실상 나랏일을 도맡아 처리하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그녀의 정치적 능력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해요. 고종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자기 아들들을 차례로 황제 자리에 앉혔다가 끌어내리기를 반복하면서 실권을 완전히 장악했어요. 자기 아들들을 황제로 만들어놓고 뒤에서 정치했다는 것도 얼마나 영리했는지 보여주는 부분이에요. 그리고 마침내 690년, 예순일곱의 나이로 스스로 황제 자리에 올라 당나라를 무주라는 새 나라로 바꿨어요. 무려 예순일곱 살에 황제가 된 거라, 중국 역대 황제 중에서도 최고령 즉위 기록이라고 해요. 예카테리나 대제도 그렇고 클레오파트라도 그렇고, 역사에 이름을 남긴 여성들은 정말 하나같이 똑똑했구나 싶어요. (출처: 위키백과 측천무후, 나무위키 측천무후)

측천무후의 파격적인 인재 등용

측천무후가 지금까지도 유능한 정치가로 평가받는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인재 등용이에요. 이 부분은 측천무후를 혹평했던 후대 역사가들조차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부분이에요. 당시 중국은 관롱귀족이라는 특정 지역 명문가 집단이 권력을 독점하고 있었어요. 근데 측천무후 본인이 그 귀족사회에서 최하층에 속하는 집안 출신이었거든요. 아버지가 벼락출세한 신흥 세력이라 뼈대 있는 귀족들한테 늘 무시당했어요. 그래서 측천무후는 자기 편을 만들려면 기존 귀족이 아닌 새로운 인재가 필요했던 거예요.

그래서 측천무후가 손댄 게 바로 과거제도예요. 그때까지 제대로 자리 잡지 못했던 과거제를 대대적으로 정비했는데, 특히 690년에 전시라는 제도를 역사상 처음으로 시행했어요. 전시란 황제가 직접 시험장에 나와 마지막 관문에서 응시자를 시험하는 제도인데, 이게 왜 중요하냐면 시험을 주관한 사람과 합격자 사이에 스승과 제자 관계가 생기기 때문이에요. 즉 황제가 직접 시험을 주관하면 합격한 관리들이 전부 황제의 제자가 되는 셈이죠. 귀족 가문이 아니라 황제한테 직접 충성하는 관료 집단이 생겨나는 거예요.

제도 내용
전시 황제가 직접 최종 시험을 주관하는 제도, 역사상 최초 시행
자거 신분에 상관없이 스스로를 추천할 수 있게 한 제도
무거 유능한 무관을 따로 선발하는 제도
제과 특별한 재능이 있는 사람을 뽑는 제도

이렇게 신분에 상관없이 능력만 있으면 나설 수 있는 길을 열어줬고, 서적도 대대적으로 간행해서 교육 기회를 넓혔어요. 그 결과 측천무후 통치기에 과거 응시자가 크게 늘어났고, 명문 귀족이 아니어도 실력만 있으면 출세할 수 있는 길이 처음으로 제대로 열린 거예요. 능력을 보고 인재를 등용한다는 게, 신분제 없는 시대를 사는 우리한테는 너무 당연한 얘기처럼 들리잖아요. 근데 저 시대에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던 거예요. 진짜 깨어있는 사람이었네요. 어떻게 보면 우리나라 세종대왕이 노비 출신 장영실을 발탁했던 것도 그렇고, 인재를 알아보고 뽑는 게 정말 대단한 능력인 것 같아요.

인재를 알아보는 눈도 정말 대단했어요. 진짜 놀라운 일화가 하나 있는데요. 낙빈왕이라는 문인이 측천무후를 혹독하게 비판하는 격문을 써서 반란군의 정당성을 주장한 적이 있어요. 자기를 욕하는 글을 읽은 측천무후의 반응이 뭐였을까요? 놀랍게도 재상을 불러서 왜 진작 이 사람을 나한테 추천하지 않았느냐, 이런 인재를 기용하지 않았으니 반란이 일어나는 것도 당연하다고 했대요. 심지어 낙빈왕이 죽은 뒤에는 그의 작품을 모아 책으로 엮게 했고요. 자기를 비난한 사람의 재능까지 아까워할 정도였던 거예요. 진짜 대인배네요 대인배ㅋㅋ 저 같으면 바로 불러서 화냈을 것 같아요. 감히 나를 욕해?! 하면서요ㅠㅠ 실제로 측천무후가 발탁한 적인걸, 장간지, 요숭, 송경 같은 인재들은 훗날 당나라의 최전성기인 개원의 치를 이끄는 주역이 됩니다. 그러니까 측천무후가 뽑은 사람들이 당나라 황금기를 만든 셈이에요. (출처: 위키백과 측천무후, 나무위키 측천무후, 아시아경제)

측천무후가 남긴 글자 없는 비석의 비밀

측천무후는 705년, 여든두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어요. 그런데 눈을 감기 전에 아주 뜻밖의 유언을 남겼어요. 첫 번째는 황제가 아니라 황후의 예로 장례를 치러달라는 것이었어요. 평생을 걸쳐 스스로 황제가 되겠다고 그 난리를 쳤던 사람이, 죽을 때는 스스로 황제 자리를 내려놓고 남편의 아내로 돌아가겠다고 한 거예요. 진짜 평생 권력만 좇았던 사람인 줄 알았는데 왜 그랬을까요? 정확한 뜻은 알 수 없지만, 제가 본 측천무후는 워낙 똑똑한 사람이라 분명 본인만의 계산이 있었을 것 같아요.

두 번째 유언은 더 놀라워요. 자기 무덤 앞 비석에 단 한 글자도 새기지 말라는 거였어요. 당시 황제나 높은 사람이 죽으면 비석에 생전의 업적과 공덕을 빼곡히 새기는 게 관례였거든요. 근데 측천무후는 그걸 통째로 거부한 거예요. 그래서 지금도 그녀의 무덤 앞에는 글자 하나 없는 거대한 비석이 서 있는데, 이걸 무자비라고 불러요. 글자가 없는 비석이라는 뜻이에요.

황후의 예로서 장례를 치르고, 묘비에 한 자도 새기지 말라.

왜 그랬을까요? 해석이 정말 분분해요. 첫 번째는 자기가 저지른 일들이 기록될까 두려워서 아예 비워뒀다는 설이에요. 두 번째는 정반대로, 자기 업적이 너무 많아서 비석 하나에 담을 수가 없으니 비워뒀다는 설이고요. 세 번째가 제일 흥미로운데, 나에 대한 평가는 후세 사람들이 알아서 하라는 뜻이었다는 해석이에요. 자기 입으로 변명하지도, 자랑하지도 않겠다는 거죠. 어쩌면 이 세 가지 의미를 다 노렸을지도 모르고요.

측천무후에 대한 평가는 지금도 갈려요. 당나라가 멸망한 뒤 유교적 질서를 중시했던 송나라와 명나라의 유학자들은 그녀를 여자 주제에 황제 자리를 찬탈한 요녀라며 혹평했어요. 아니 여자 주제에 황제 자리를 찬탈했다니 너무하지 않나요. 옛날이니까 저런 말을 할 수 있었지 요즘 시대에 저렇게 얘기하면 돌 맞아요ㅋㅋ 다행히 청나라 말기 신해혁명을 거치면서 평가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어요. 실제로 그녀가 권력을 쥐고 있던 시기에 농민반란이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고 백성들의 살림살이는 오히려 안정됐거든요. 그녀가 통치한 15년을 무주의 치라고 부르는데, 당 태종의 정관의 치에 버금간다는 평가까지 받아요. 게다가 앞서 말한 것처럼 그녀가 뽑은 인재들이 당나라 최전성기를 만들었고요.

여러 가지 평가가 있을 수 있겠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긍정적인 쪽에 손을 살짝 들어주고 싶어요ㅋㅋ 물론 권력을 잡는 과정에서 잔혹한 면이 있었던 건 분명하지만, 그 시대에 여성으로서 그 자리까지 올라 나라를 안정시키고 인재를 길러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결국 측천무후가 비석을 비워둔 게 신의 한 수였던 셈이에요. 천삼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람들이 그 빈 비석 앞에서 그녀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논쟁하고 있으니까요. 아마 그게 측천무후가 정말 노린 것이었을지도 모르겠어요. (출처: 오마이스타, 위키백과 측천무후, 나무위키 측천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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